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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Research

[책] <20세기 문명과 야만> (이삼성 1998) - 제1장 - 요약



20세기의문명과야만

저자
이삼성 지음
출판사
한길사(도) | 1998-02-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144299] *578쪽 | B5 /하드커버 *앞덧지에 필기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20세기 문명과 야만 (이삼성 1998)

이삼성 교수의 저작들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학교선배가 적극추천해준 <현대미국외교와 국제정치>(1993)를 읽고 나서부터이다. 지금까지 저자의 글들에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저자 스스로 자기가 공부하고 이해한 것,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 또는 사안에 대한 지식을 치밀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성실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이는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펴기까지 그가 섭렵한 수많은 다양한 시각들의 논문과 저서들을 분석-요약해주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에 대한 그의 요약과 해석은 마치 그가 연구했던 과정을 똑같이 따라서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간접경험을 가능케 해준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 등에 대한 그의 시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란 것은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다다르는 결론에 대한 다수의 반박이 있을지언정 다양한 시각을 섭렵하는 그의 연구방법에 대해선 편향적이라 비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인 한국의 국제정치학에 있어서 과연 한국에 국제 정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저자의 책들은 비판적 성찰의 중요성을 알리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이야기를 하는 지식인이다. 

<20세기 문명과 야만>577장의 분량 796개의 각주, 25페이지 참고문헌 목록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이삼성 교수의 대작 중에 하나다. 이 책은 출간된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과 단재상을 수상했으며 주요 일간지에 21세기에 큰 영향을 줄 책 100선 등에 꼽혀있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David Harvey의 저서 <The Condition of Postmondernity>를 읽은 경험과 비교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하비의 이 책은 지난 세기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다양한 학문적인 영역을 넘나들고 방대한 정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고 풀어낸 것으로 개인적으로 고전들 이후의 책들 중 잊지 못할 경외심을 느끼게 한 책이다. 이삼성 교수의 이 책은 그때와 매우 유사한 경험을 주는 책이다. 지난 세기의 세계사에 대한 방대한 역사와 다양한 학문영역을 넘나드는 책. 20세기 자본주의발전이 이룩한 문명이 야만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과 달리 이러한 문명에서 또 다른 가공할 야만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대한 정치적 성찰. 세기의 자화상. 다음 세기를 어떻게 구상해야 할지 생각하게 해주는 비판적 성찰의 책

참고로 이삼성 교수의 책은 안타깝게도 가장 최근 것들 빼고 대부분 절판된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중고장터에서 구입가능하다. 

아래는 이제 막 1장을 마쳐가는 현시점에서 적기 시작한 공부노트이다. 나머지 장은 이후 새로운 포스트에서 이어 정리하고 리뷰라는 엄두내기 어려운 작업은 노트정리가 끝난 이후에 다시 고민해보기로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한 관계로 책의 주요 주장과 목적에 관해서는 일단 이삼성 교수가 서문에서 명확하게 밝혀놓은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생략한다:

 

서문 – “한 세기의 폐허 앞에 선 자기성찰 

이 책에서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저자가 수미일관하게 드러내고 또 강조하고자 한 것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운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사회의 사회 및 정치적 제도, 그리고 인간과 집단의 일련의 선택들의 역사적 결과라는 관점이었다. 전쟁과 폭력과 야만은 역사적 제도와 문명에 압축된 인간과 집단과 강대한 국가들의 사유와 선택과 정치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과 평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역사적 제도와 정치의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쟁을 부추기는 제도와 정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그리고 야만을 내포한 문명 전반의 기초로 작용하는 사유의 원리들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거꾸로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제도와 정치를 이끄는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저자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불행과 절망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인식을 뛰어넘어 우리들의 선택과 판단이 개입하여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제도와 정치적 공간으로서 그 문제들을 바라볼 필요성을 상기하려고 했다. 다만 그것이 기존의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국제정치론에서 거론하는 것들 이상으로 더 포괄적이고 때로는 더 급진적이며 또한 철학과 사회학을 포함한 여러 가지 다학문적인 접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싶었다.

 그 제도와 정치의 성격에 대하여는 구조의 무게를 강조하는 구조주의적 관점, 그리고 인간 개개인의 행위와 선택을 강조하는 행태적 관점 등으로 지적 분열을 내포하고 있지만, 어떻든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커니즘들에 대한 정치사회적 시각을 전제하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인식이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출발할 때 우리가 역사를 반추하고 오늘날 미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의 방향을 나름대로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1-12)

 

1장에서는 특히 현대사에서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그것이 내포한 야만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서 20세기 문명과 인간조건의 진보와 함께 그것이 내포한 빈곤과 위험한 함정들을 되돌아본다. 계몽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근대자본주의의 기술문명과 강대국 권력정치현상이 인종주의, 식민지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등과 결합하면서 전개된 제2차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 그리고 일제에 의한 조선의 종군위안부문제로부터 20세기 말에 계속된 보스니아와 르완다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제노사이드의 비극에 대한 여러 가지 학문분야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저자 자신의 생각들을 담았다.” 추가적으로 저자는 “20세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세계와 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억압의 구조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갖는 의미도 언급하였다.” (8-9)

 

 ***


1– “20세기 그 절망의 문명

1.     프리모 레비와 아우슈비츠

2.     101보안경찰대대

3.     국제정치학은 왜 전쟁을 문제삼는가

4.     20세기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5.     제노사이드의 사회심리학

6.     일본의 군국주의와 동아시아질서

7.     종군위안부의 문제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8.     한국전쟁과 충북 영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9.     탈냉전과 민족주의의 문제: 보스니아

10.   르완다의 비극과 한반도

11.   제도로서의 전쟁

12.   세계체제론에서의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13.   여성의 문제와 문화적 상대주의 그리고 평화

14.   21세기 첨단전쟁과 과학기술적 상상력

 

***




1– “20세기 그 절망의 문명



1. 프리모 레비와 아우슈비츠

이삼성 교수의 대작의 첫 장, 첫 절 프리모 레비와 아우슈비츠의 첫 문장은 프리모 레비의 <Survival in Auschwitz>(1996)를 참고하며 시작된다: “1943 12 13일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24세의 유태계 이탈리안인이었다.”(19) 프리모 레비의 기억을 토대로 유태인 학살 홀로코스트 20세기 문명의 야만의 첫 사례로 꼽고 수용소 내에서 벌어진 잔악을 묘사한다. 무엇보다 레비의 기억은 수용소와 가해자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그 안에 갇힌 피해자들 자신 또한 변하게 했는지 밝힌다: “레비는 수용소에 갇힌 인간들이 어떻게 인간성을 상실해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형태들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한눈을 팔고 있으면 금방 신발, 옷이나 칫솔 같은 것들을 도난당한다. 훔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신발이 맞지 않아 제대로 걸을 수가 없거나 또는 그렇게 해서 병이 나면, 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몸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행색이 더욱 초라해지면 선별당하기도 쉬울 뿐더러 당장 불편하기 때문이다. 동료 희생자들의 것을 서로 훔치는 것이다. 그리고 갖은 수완을 부려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했다.” (23) 선별되어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기 위해 수용소에 갇힌 피해자들끼리마저도 인간성을 상실”(24)하고 서로에 대한 경쟁을 해나가는또 하나의 정글”(24)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례가 가공할 조직적 폭력 앞에서 개인들의 한없는 무력함과 무참하게 이루어지는 인간성 상실의 양태를 말해준다”(24)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 개인들이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을 저주”(24)하기 전에 이러한 야만을 부과하는 가공할 사회적 조건의 재연”(24)을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난다고 결론지었다. 야만은 인간 개개인의 본성이 아닌 인간사회의 구조와 이와 상호작용을 하는 인간과 집단의 결합체라는 저자의 시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2. 101 보안경찰대대

2절에서 저자는 홀로코스트의 야만에 대한 더욱 면밀한 검토를 위해 그 가해자들에게 주목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이러한 야만에 가담하였는가? “그들은 과연 특수한 집단이었는가. 아니면 평범한 아버지요 남편이요 직장인들이 특정한 환경조건에서 끔찍한 살인집단의 역할을 수행해낸 것인가…. 말하자면 그 학살자들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문명, 우리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있는 이방인 집단이었는가, 아니면 그들이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이었는가…”(26)

저자는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1992)를 인용한다 브라우닝의 저서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학살작업에 동원된 나치군대 후방의 보안대(SS)와 치안예비경찰(Reserve Order Police)들의 학살활동을 치밀하게 추적한 것인데, 저자는 이 중 치안예비경찰 133대대의 한 중대장이 1942 9 14일 상관에게 보고한 것(27-30) 101대대의 사례를 기록한 것(30-42)에 주목한다. 특히 101보안경찰대대는 3개 중대, 500명 병력에 지나지 않은 부대였는데도 불구하고 1942 7월 조제포우(Jozefow)에서 1,500명의 유태인을 집단학살을 시작으로 1943 11월 포니아토와(Poniatowa)에서 14,000천명의 유태인을 집단학살하고 해체될 때까지, 1 4개월 동안, 83,200명의 유태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집단이다 (수용소에 유태인을 끌고 간 인원 45,200, 직접 학살한 유태인 38,000) (26). 무엇보다 101대대는 브라우닝이 기록하길 처음엔 대량학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던 가해자 집단이 점차 죄책감을 덜어주는 다양한 장치들을 설치하며 기록적인 대량학살을 자행한 집단으로 20세기 야만의 가해자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가능케 한다. (Christopher R. Browning (1992)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 Harper Collins.)

보다 자세히 서술하자면 저자는 101대대의 대대장 빌헬름 트랍(Wilhelm Trapp)과 그의 부하들의 대량학살에 대한 첫 반응과 이후에 나타난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브라우닝이 기록하길 1942 7월 폴란드 중심부 루블린에 주둔하는 나치 보안대대장 오딜로 글로보크니크(Odilo Globocnik)101대대에게 유태인 1,800명을 체포하고 재배치(resettlement)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31), 이를 집행한 101대대는 이후 역사에 기록된 그들의 잔악함과는 달리 집행초기엔 대량학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었다고 한다. 재배치(resettlement)라는 임무는 유태인들을 단순히 수용소로 추방하는 작업이 아니라 노동연령의 유태인 남자들은 선별하여 노동수용소로 보내고 이외의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들은 즉각 사살하는 것으로 대대장 트랍 소령은 이 같은 명령을 처음 하달 받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으며 (병사 중의 한 명은 그가 화장실에서 슬프게 울었다고 증언하였다고 한다)(32), 대대의 다른 지휘관들에게 작전내용을 전달한 하겐 중위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작전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한 1중대 소속 하인츠 부흐만 소위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른 임무를 맡도록 주선해주었다(31). 또한 작전설명 당일 트랍 소령은 병사들에게 작전에 참여할 수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열외로 나설 기회를 주었고 ( 10명의 병사가 열외로 나섰으며 이후에도 다수의 병사들이 열외를 요청하고 다른 임무로 변경되었다)(32), 첫 학살작전이 시작된 이후엔 많은 부대원들이 처음에는 갓난아이들과 어린아이들의 사살을 피하려고 하거나(33)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피해 총을 쏘기도 하고(36) 마을을 수색하던 도중엔 숨어있기도 하였다고 한다(36). 직접 학살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유태인들을 숲속으로 이동시켜 처형하였는데 (1사살조와 제2사살조가 번갈아가며 총살), 이후에 들어가는 사살조는 전 사살조가 사용한 사살장소 보다 떨어진 곳에서 집행하여 먼저 처형된 시체를 다음 희생자들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35). 또한 처형할 때에도 엎드리게 한 뒤 즉각 죽일 수 있는 (또 다른 확인사살이 필요하지 않은) 목덜미에 총을 쏘아 죽이는 목덜미총살’(neck shot)을 사용하였다(33). 이러한 부분들은 학살작전 초기만해도 이들 병사들에게 인간성이 모두 상실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학살작전이 이어질수록 맨 처음 죄책감에 흐느끼던 트랍 소령은 더뎌지는 처형속도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으며 1중대 외에도 2중대와 3중대를 불러들여 사살조에 가담하도록 지시하였고,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추가 열외요청에 대한 제안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36).

조제포우 학살작전이 끝난 이후엔 101대대원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거부감을 느끼고 이로 인해 대대원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를 위해 대대장 트랍과 그의 상관들은 폴란드에서 유태인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Final Solution), 즉 유태인의 제거작업을 성공적으로 지속하고 완성하기 위하여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한다(38). 무엇보다 병사들의 심리적 부담경감을 위해 학살작업 자체를 대부분 수용소에 넘기는 것과 과정에서 즉각 죽여야 하는 유태인들은 제3의 동유럽 인종들에서 징발한 트로우니키스(Trawnikis) 대원들에게 맡기는 2가지 분업방법이 고안되었다(36). 처형 방법에 있어서도 보다 빠른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예를 들어 조제포우 학살 한달 후 벌어진 로마지의 학살에서는 1,700명의 유태인을 트로우니키스 대원들을 활용하여 진행하였는데, 이 때 유태인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아놓고 60~70여명의 유태인 청년들은 선별하여 숲속에 데려가 대형무덤을 파게 하였다고 한다(38). 그리고 총살된 시체를 보지 못하게끔 했던 조제포우와 달리 대형무덤 밑에서부터 유태인들을 엎어놓고 총살하고 바로 그 시체들 위에 유태인들을 또 엎어지게 하고 총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9). 병사들에게 제공된 술도 조제포우와 달리 학살 이후가 아닌 학살 이전 (학교 운동장에서 대기하는 동안)에 제공되었다(39). 결과적으로 로마지는 조제포우와 비해 1/3 병력과 절반에 지나지 않는 시간으로 더 많은 유태인을 학살하였다(39).

브라우닝에 따르면 로마지 사례에서 병사들의 심리적 부담경감을 위해 활용된 방식은 우선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 작업이다. 101대대원들과 유태인이 한 명씩 짝을 지어 사살장소로 이동했던 조제포우와 달리 로마지 경우 대대원들이 희생자와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39). 조제포우에서 많은 병사들이 자신이 죽인 희생자들을 거의 기억한 것에 반해 로마지에서는 대부분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39)이 이러한 비인격화 작업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반복에 의한 일상화(routinization) – “학살에 대한 습관화효과도 있었다고 한다(40). 추가적으로는 브라우닝은 로마지 사례에서는 병사들에게 열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40). 선택을 주지 않음으로써 부대원들의 자책감을 덜어주었다는 것이다.

브라우닝에 따르면 이러한 부담경감작업 이후 많은 병사들이 기꺼이 학살작전에 자원하였으며 수색 및 사살조를 편성하는데 자원자가 모자라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41). 이는 첫 학살작전 초기의 101대대와 이후 그들의 변모한 모습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101대대의 잔혹함의 기원을 논의하기 위하여 저자는 브라우닝이 소개한 다양한 시각들을 소개한다. 크게 두 가지 시각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은데 첫째는 나치를 특별한 종류의 인간집단’(42)으로 보는 시각이고, 둘째는 이를 비판하고 특수한 본성이 아닌 사회적 기원에 따른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우선 전자의 시각의 예로 브라우닝이 설명하고 저자가 인용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The Authoritarian Personality>(1950)에서 나치를 권위주의적 성격’(authoritarian personality), ‘잠재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개인들로 규정한다. 즉 아도르노는 나치는 특별한 종류의 인간집단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Theodor Adorno, Else Frenkel-Brunswick, Daniel J. Levinson, and R. Nevitt Sanford (1950) The Authoritarian Personality, Harper, pp. 1-10.)

이러한 특수성에 대한 시각을 비판하는 것으로 브라우닝이 언급하고 저자가 인용한 인물들은 지그먼트 바우만, 존 스타이너, 어빈 스타웁이다(42-44). 우선 지그먼트 바우만은 <Modernity and the Holocaust>에서 아도르노의 논리에 따르면 나치즘의 잔악함은 나치대원들이 잔인하고, 이러한 성격을 가진 자들이 나치대원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논리인데 이는 평범한 인간들이 잔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또한 잔인성은 특수한 인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Zygmunt Bauman (1989) Modernity and the Holocaust, Cornell University Press, pp. 166-168)

존 스타이너도 유사하게 “The SS Yesterday and Today: A Sociopsychological View” (1980)에서 아도르노는 가해자들의 성격의 요인만을 강조하고 사회적-문화적-제도적(상황적) 요소들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타이너는 야만성에 대한 사회적 기원을 강조한 바우만과 달리 아도르노가 지적한 가해자들의 특수한 잠재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 스타이너는 잠재적 성격이라는 특수성과 바우만이 말하고 있는 상황적 요소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성격은 평소에는 잠재자’(sleeper)로 있다가 상황적 조건이 갖추어 질 때 나타나는 것으로, 나치의 경우엔 폭력의 하위문화’(subculture of violence)를 가진 집단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성격이 발휘되게 하는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John M. Steiner “The SS Yesterday and Today: A Sociopsychological View,” in Joel E. Dimsdale, ed., Survivors, Victims, and Perpetrators: Essays on the Nazi Holocaust (1980), Hemisphere Publishing, pp. 431-434)

어빈 스타웁은 <The Roots of Evil: The Origins of Genocide and Other Group Violence>(1989)에서 스타이너가 말하는 잠재적 폭력적 성격을 받아들이지만 스타이너와 달리 이것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만 잠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에게도 잠재해 있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Ervin Staub (1989) The Roots of Evil: The Origins of Genocide and Other Group Viol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26, p. 126)

결론적으로 저자는 브라우닝이 치밀하게 조사한 101대대원들의 행동들과 나치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그들의 야만은 그들이 원래 잔인한 성격을 가진 특수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평범한 보통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가공할 함의”(44)를 던진다고 요약하고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한나 아렌트의 저서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을 언급하며 2절을 마친다.

 

20세기 문명시대에 벌어진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적 사례를 당시에 벌어진 예외적인 것으로 여기고 해당 집단의 특수성을 주장한 시각에 의문을 던지는 이 부분은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자 한 야만 전쟁, 폭력 의 문제는 인간의 본성, 우주론, 운명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주장하는 기억의 정치로부터(이후 자세히 서술) 변화하거나 이어져나가는 인간사회의 사회 및 정치적 제도, 그리고 이에 대한 인간과 집단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역사적 결과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다시 말해 저자는 홀로코스트라는 기록적인 잔악을 예외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이 처한 구조에 대한 이해, 정치사회적-역사적 시각을 기반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원리들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엔 바로 비판적 성찰은 평화를 위한 제도와 정치를 만들어가는데 우리들의 선택과 방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데 핵심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내포되어있다.

 

 

3. 국제정치학은 왜 전쟁을 문제삼는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첫 두 절과 달리 3절은 특히 짧다. 여기에선 저자가 왜 전쟁이 국제정치학을 포함한 여러 학문들에 문제로 삼아지는지 답하고 이러한 전쟁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서술한다.

우선 전쟁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저자가 말하길 바로 전쟁이라는 것은 무장집단들 간의 대결이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량살육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연구는 바로 전쟁을 제노사이드(genocide)로 연결되는 메커니즘과 그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간학적·철학적·정치학적 근거에 대한 탐구라는 의미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46).

이어서 저자는 전쟁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이 중 세 번째가 바로 저자가 뜻을 같이 하는 시각이다. 우선 첫째는 우주론적 시각으로 전쟁을 포함한 인간의 비극을 신의 섭리, 우주의 법칙에서 찾는 것이다(46). 따라서 전쟁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둘째는 생물학적 시각인데 이것은 인간이 열악한 생존환경에 시달리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생존이외의 것을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쟁을 하고 그 전쟁 안에서 살육의 도구로 종사하거나 살육의 비극 앞에서 용기있는 행동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존의 취약함 때문에 당장의 생존이라는 것이 절대가치가 되며, 따라서 당장의 생존 이외의 다른 공영적·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두지 못한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 때문에 전쟁과 그 전쟁 안에서의 비인간적비극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생물학적 시각에서 전쟁과 그 비극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이 될 수 있다.”(47) 세번째 시각이자 저자가 수미일관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시각은 바로 전쟁을 하나의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이며 인간사회가 후천적으로 발명한 것(invention)”(48)으로 보는 시각이다. 즉 전쟁이 나쁜 사회적 제도에 의한 결과라면 그것을 대체하는 보다 나은 사회적 제도를 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48). 이러한 세 번째 시각은 특히 두 번째 생물학적 시각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마가렛 미드의 경우 생물학적 시각의 논리는 인간이 필연적인 공격적 본능이 갖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관점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자가 미드의 저작을 설명하길 미드는 에스키모족이나 히말라야의 렙차족(Lepchas)에게는 전쟁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인간은 천성적으로 전쟁을 하게 되어 있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부정”(47) 하였다고 한다. 또한 에스키모족의 사회조직이 발전하게 되면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란 반론에 미드는 사회조직화가 되면 자동적으로 인간은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끔 근원적으로 결정지어져 있다는 논리에 반대한다”(47). 그 근거로 벵갈만의 안다만 제도의 피그미족들은 에스키모족보다 사회조직이 발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였다는 점 등을 제시하며 사회조직화의 발전 그 자체가 그 인간집단의 전쟁지향성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이 아님을 주장다. (Maragret Mead (1940) “Wafare Is Only an Invention – Not a Biological Necessity,” Asia, Vol. 40, No. 8, pp. 402-405.)

 

다시 말해 저자는 미드가 제시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 시각과 동일하게 인간문명의 비극적 측면을 인간사회의 역사와 내적 요인 안에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전쟁이 제노사이드로 확대되고 발전하는 주요 메커니즘을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원인들에서 찾고 이 둘 사이의 연계고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성찰을 가능케 하고, 따라서 2절과 같이 저자는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한 우리들의 역할과 선택이 중시된다고 말한다.

 


4. 20세기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전쟁에 대한 짧은 논의 후 저자는 다시 아우슈비츠에 대한 재언급을 시작으로 – “20세기 서구 근대문명의 야만성은 아우슈비츠가 상징한다”(49) – 이외의 20세기의 여러 야만적 사례들을 보면 이러한 잔혹함을 특정 집단의 야만성이나 민족성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 범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20세기 전반 서양과 동양에 걸친 세계대전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쟁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민족(종족)분쟁에서 인간의 집단적 야만성은 여실히 되풀이되었다.”(49) 저자가 인용한 브르제진스키의 저서 <Out of Control>(1993)에 따르면 “20세기에 정치적 동기로 학살된 사람들의 숫자는 167백만 명 내지 175백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했다.”(49) – “1915-17년 사이 터키인들이 학살한 아르메니아인들은 150만명에 달했고, 나치스에 학살된 유태인들은 582만여 명이었다. (Zbigniew Brzezinski (1993) Out of Control, Charles Scribner’s Sons, p. 17.)

어느 누구에 의해서 벌어질 수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야만의 보편성은 앞서 언급된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성에 대한 시각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야만성은 왜 특정 시점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저자는 우선 허버트 허쉬의 저서 <Genocide and the Politics of Memory: Studying Death to Preserve Life>(1995)를 인용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허쉬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인종적, 종교적, 지역적 정체성에 대한 차이로부터 서로를 증오하는 원초적 충동(primal impulses)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충동은 특히 집단적 기억이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들 것 만들어진 것들, “어디에서나 존재”(50)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밝히고, 이러한 충동이 비극적인 실행으로 옮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충동에 대한 동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저자는 허쉬의 저서를 통해 20세기 야만의 실현은 바로 동원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정치의 영역”(51)이라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전쟁과 폭력의 절정으로서 제노사이드의 악순환”(51)을 일으키는 요인은 집단적 증오이고, 이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제도들을 통한 사회화라는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의 이념이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ies)”(51)으로 형성되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Herbert Hirsch (1995) Genocide and the Politics of Memory: Studying Death to Preserve Lif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p. 2.)

저자가 인용하여 설명한 마이클 아이젠버그 또한 그의 저서 <Puzzles to the Past: An Introduction to Thinking about History>(1985)에서 역사는 말해지고 행해진 것들에 대한 기억” – “과거에 이루어진 말과 행동들에 대해 현재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고 따라서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집단적 인식을 결정할 뿐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인식을 형성,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허쉬가 위에 인용된 저서에서 말했듯 결국 역사를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선택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Michael T. Isenberg (1985) Puzzles to the Past: An Introduction to Thinking about History, Texas A&M University Press)

다시 말해 저자가 따르고 있는 야만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시각은 20세기 문명의 잔혹성을 우주론적이거나 생물학적 현상이 아닌 정치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특히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집단의 기억에 대한 정치가 바로 한 집단의 폭력성으로 발현되게 하는 주요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기억이란 매우 정치적인 현상으로 기억의 정치” – “기억의 망각과 왜곡, 부인, 조작의 정치”(51) – 는 한 시대의 비극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주요한 예로 저자는 허시의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인들에 대한 분석을 주목한다. 독일인들은 2차세계대전 이후 초반에 나치즘을 주로 히틀러의 시대’(Hitler’s Time)로 묘사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허쉬는 이것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히틀러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집단적인 기억의 정치가 작용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52) 이외에도 기억의 정치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과거 1945-55년 사이 전쟁범죄혐의로 재판 받은 12 3천 명의 오스트리아인들 중에서 13,600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 나치 장교였던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이 유엔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1987년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례, 프랑스인들 자신도 유태인들을 체포해 나치의 수용소로 보낸 사실을 은폐축소한 사례 등이다. 또한 허쉬가 언급하고 있지 않은 사례들로 저자가 추가하는 사례들은 미국이 나치에 대한 정의의 전쟁을 펼친 반면 중동지역의 전략적 이유로 팔레스타인민족의 인권유린을 묵인하고 친이스라엘정책을 일관한 것, 미국과 캐나다의 역사-사회교과서들의 편향성 (흑인노예제도에 대한 캐나다와 미국의 과거 축소, 2차세계대전 중 캐나다가 일본계 주민들을 구금했던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 등이다. 추가로 하워드 진이 서구열강이 아닌 식민지 피지배층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이른바 포스트식민지주의(postcolonialism) 시각의 저서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42~Present>(1980)을 언급하며 오늘날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의 모순을 지적한다.

(Howard Zinn (1980)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42~Present, Harper Perennial.)

 

이러한 일련의 사례들은 결국 많은 역사가 세계중심국들 의주로 쓰여져 왔으며, 이를 위해 오늘날까지 그들의 기억의 정치가 20세기의 또 다른 여러 야만성을 은폐-축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은폐과정은 우리들의 비판적 성찰,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메커니즘을 찾는 과정을 방해함으로써 그 다음 세기의 평화를 구상하고 구현하는데 유해하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 보다 야만이 가득했던 20세기 문명을 다시 비판적으로 돌이켜봐야하는 가장 큰 이유다. 

 


5. 제노사이드의 사회심리학

5절은 저자가 20세기의 야만성에서 제노사이드에 집중조명하는 절이다. 4절에서 밝힌 기억의 정치와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발현되는 데에는 그 야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대와 집단이 필수 요소라고 주장하는 허쉬의 주장에 따라 저자는 허쉬가 말하는 집단범죄를 실행시키는 정치적 메커니즘을 서술한다(62). 앞서 101대대가 유태인 학살의 효율성을 높이게 위해 실행한 조치들을 분석한 2절의 브라우닝의 연구와 유사한데 첫째는 허가(authorization)”(62)이다. “’허가받은 대량살육’(sanctioned massacres)”(62)은 집행집단의 도덕적 감각을 상쇄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정치과정이다. 둘째는 일상화(routinization)”(62)로 기계화된 과정과 일상화 또한 집행집단의 도덕적 기준을 변질시킨다. 셋째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62)로 살상의 대상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세뇌과정이다.”(62) 모두 행위자들의 기억을 특정 방향으로 형성하고 같은 인간을 대량으로 학살하기 위해 도덕적 제약을 벗어버리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가 20세기 야만에서 기억의 정치와 과학기술이 맡았던 역할을 비교분석한 부분이다. 기억의 정치란 제노사이드와 같은 야만의 실현에서 비인간화의 사회심리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담당한 것(63)에 반해 과학기술은 핵무기와 유도미사일체계 등 첨단 무기를 발명하게 됨으로써 비인간화 과정의 물질적 차원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63)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물리적 접촉을 줄이는 첨단 무기들의 발명은 기술과 문명의 발전에 의해 평화가 더욱 실현 가능해진다던 계몽주의적 사고와 달리 오히려 야만의 가능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기억에 따라 학살집단의 개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메커니즘인지는 로버트 리프턴의 저서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예를 들어 학살자 집단은 현실의 모순(absurdities in realities)을 어느 정도 인식은 하지만 곧 그것을 자기부정함으로서 위조된 세계’(counterfeit universe)를 창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유용하게 하는 것이 베트남전쟁 중 군인들이 애용한 헤로인과 마리화나 등 마약복용이나 독일군들의 유태인수용소에서 수용된 여성들에 대한 변태적 성적 학대를 통해 스스로 “’심리적 불감상태(psychic numbing)”를 불러일으키는 방법 등이다. 또한 집단 구성원들의 현실에 대한 부담을 감소시키고 학살을 지속시키기 위해 많은 지휘관들이 기억의 정치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을 비현실화(derealization)”하고 그들의 자기합리화를 돕는다. 예를 들어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국가안보의 절대성과 같은 가치를 최우선으로 세뇌시키는 것이다. 집단의 양심을 세탁해주고 도덕적 판단에 의한 불복종과 갈등은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정교한 이데올로기의 작업이다.

(Robert Jay Lifton (1973) Home From The War: Learning from Vietnam Veterans, Beacon Press.)

결국 대량살육이라는 비극은 허쉬가 지적하였듯 비극을 집행하는 집단이 파괴의 대상을 비인간화시키는 문화적·인종적 신화와 획일화(cultural and racial myths and stereotypes)라는 문화적 과정,” “살인을 집행하는 개인들에게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는 사회심리적 과정,” 그것을 모두 정당화시키는 정치적 과정이라는 세 가지 과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요 내용: 저자는 전쟁과 제노사이드의 비극을 우주론이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역사와 사회정치적 제도의 문제로 파악. 그 매개로서 인간의 집단적 역사의식인 기억의 정치를 조명.

 


6. 일본의 군국주의와 동아시아질서

20세기에 벌어진 야만으로 꼽히는 또 다른 사례는 일본의 군국주의이다: 일본의 야만은 일본사회와 역사의 어떤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경제사적 맥락 외에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일본의 내부는 어떠한 것이었나?(70)

저자가 소개하길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대한 분석은 크게 4가지 시각이 있다. 첫째는 일본의 침략적 행동이 극단화된 1931~1945년 사이인 약 15년간의 시간을 일본역사의 흐름에서 하나의 예외로 보는 시각이다.(71) 하지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조세프 맥더못의 경우 1931년 이전에도 일본이 러일전쟁, 청일전쟁 및 한국 병합 등 다수의 군사주의적-제국주의적 사례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따라서 그 15년간의 시간이 하나의 일탈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71)

또 다른 시각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일본사회의 문화/특수성에 주목하는 시각으로 사무라이 정신이나 무사계급지배의 전통을 바탕으로 형성된 군사주의 에토스가 바로 일본의 20세기 야만성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어 인용하고 있는 맥더못이 반론을 제기하였듯 이러한 주장의 약점은 바로 일본이 1600~1853년 개항 전까지 한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대평화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과 사무라이계급 또한 일본 인구의 2%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71)

보다 세련된 관점이라고 저자가 소개하는 세 번째 주장은 당시 일본군부의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세력과 농민들의 징병, 그리고 천황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다(71): 군부활동에 대한 실질적 헌법적 제약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징병된 농민들이 동원되고 이데올로기로 세뇌되어 이러한 야만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맥더못은 이 부분에 있어서 정치-경제 엘리트의 역할이 누락되고 마치 군부가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일본군부의 행동은 깊은 정치사회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군부의 노선은 정치경제엘리트들의 지향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군부로부터의 국가동원, 천황이데올로기의 활용만으로 일본 당시의 침략성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야만에 대한 정치경제사회학적 이해는 바로 일본 군국주의 역사를 독점자본주의국가들 간의 제국주의전쟁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시각의 일본의 야만은 바로 빠르게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고 높은 소작료제도로 일본 농민들이 황폐혜진 시점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소비하게 위해 해외시장 개척이 번영의 필수가 된 것, 이어 이것이 바로 일본의 군사주의적 과거가 결합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주장이다.

추가적으로 맥더못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 아시아질서가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요소라고 소개하였다. 서구열강에 의한 일본의 개항 이전의 동아시아는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조공체제(tribute system)를 맺는 중국 중심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한국과 약간의 교류만 갖고 (18세기 전체에 걸쳐 11번의 교류에 불과) 중국 중심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 당시 주변국들과 어떤 동맹이나 우호관계의 틀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19세기 중반 일본은 서구열강의 외적 충격에 의한 개항을 했고 영국과 다른 서구열강들이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자유무역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주장하며 경제교류특권을 요구해옴으로써 동아시아의 판도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서구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주변국과 제도화된 외교관계가 없었던 일본은 서구열강에 의해 자신들이 경험한 무역조약항구체제’(treaty port system)를 중국과 한국에 그대로 재사용한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5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불평등조약을 이끌어낸 것들이 주요 예다).

결국 첫째, 서구열강에 의해 당시 중국 중심의 질서가 사라졌다는 점, 둘째, 일본이 당시 주변국들과 서로의 관계를 정립하는 교류관계가 부재하였다는 점, 그리고 셋째, 이러한 국가가 서구문명의 도입으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 세가지 부분들이 바로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경제특권만을 요구한 서구열강들(‘informal empire’)과 달리 아시아를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지배하는 공식제국을 추구하게 된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저자가 정리하길 이러한 맥더못의 시각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당시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던 일본이 아시아가 아닌 그 외부세력인 서구와 상호작용함으로써 일어난 것 – “아시아 국제관계의 특수성과 일본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적 행태의 연관성을 밝힌 것”(76) – 이라 파악하는 것이다.

(Joseph McDermott (1995) “Modern Japan and War: A Problem with a Past,” in War: A Cruel Necessity: The Bases of Institutional Violence, Robert A. Hinde and Helen E. Watson, eds., Tauris Publishers)

이어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일본이라는 특정국가의 국민의 특정시대에 있어서의 특수한 심리를 밝히는데 초점”(76)을 맞춘 저작을 소개한다. “일본적 심리구조와 일본 파시즘 사의에 연관에 주목”(76)한 이 논문은 일전에 소개된 브라우닝이 학살에 동원된 부대원들의 심리구조와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나치즘)을 통해 발현되는 야만의 보편성을 설명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전자는 일본의 특정시대 특정국민의 취약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야만을 설명한 것이고, 후자는 특정시대 특정국민이 아닌 그 어떤 인간사회와 역사에서도 자행될 수 있는 야만을 논의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1997)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김석근 옮김, 1장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저자가 요약하는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본사회 내 수평적 윤리체계의 부재, 이를 대신하는 천황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위계질서가 군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지속/정당화시키고 민간인들을 동원시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수직적으로 연결하는 비민주적이고 전제적인 역사적 제도가 일본인들의 윤리와 사회의식에 초래한 왜곡된 심리구조에서 천황과 국가가 군의 군국주의적 침략과 야만에 일본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종사한 근원을 찾았다. 천황을 정점으로 수직적으로 조직된 역사적 제도와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군국주의에 동원되어 충실히 봉사한 일본인 일반의 사회심리의 일치 속에서 일본 군국주의라는 불행의 근거를 찾았던 것이다.”(77)

마사오가 지적한 일본인들의 수직적 윤리체계는 바로 개인들의 사적인 영역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지워버리는일본 군국주의의 초국가주의적 특성에 부합한다. 따라서 당시 시대의 야만은 폭력적 국가권력과 일본대중의 혼연일체가 된 수직적 결합,” 바로 그것이 일본 파시즘의 주도세력의 권력장악과 행동의 경제적·사회적 조건 그 자체보다 그것의 대중적·시민적 기반, 그리고 그 기반의 핵심적 요소로서 일본 시민일반의 내면적인 왜곡된 심리구조를 통해 일어난 것이다.

개번 맥코맥도 일본사회의 심층구조와 국제화’”라는 논문에서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이데올로기적인 수직적 인간관을 20세기 일본의 야만성의 뿌리라고 주목하였다고 한다.

(개번 맥코맥 (1994) 「일본사회의 심층구조와 국제화」, 『창작과 비평』, pp. 122-149.)

*위의 사례들은 궁극적으로20세기 야만을 인간본성 외에 것에서 찾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것들이다.



7. 종군위안부의 문제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저자는 19928.15 특집으로 문화방송사가 제작방영한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당시 정신대차출 등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부족했던 저항, 특히 친일이나 침묵을 통해 기득권을 보전했던 식민지 한국인엘리트, 오히려 적의 편에서 앞잡이 놀이를 했던 이들을 상기시키며 현재 우리가 당시 겪은 역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성찰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태도를 가질 수 있다고 저자가 요약한다. 첫째는 그 모든 책임을 일본인들에게 돌리고 일본인들죽이기에 집중하는 것”(81)이다 (기억의 정치의 작용). 둘째는 자기성찰로 역사 속 조선의 병폐를 주목하는 것이다. 간략히 줄이면 저자는 당시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사회체제개혁, ‘위로부터의 혁명을 실행한 일본의 집권세력과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청국군대와 일본군대를 불러들여 밑으로부터의 개혁마저 꺾어버린 조선봉건체제의 집권세력, 동학농민혁명운동 사례를 비교한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하여 인용하는 논문은: 김기혁 「이홍장(李鴻章)과 청일전쟁: 외교적 배격의 고찰」, 유영익 외 (1996) 『청일전쟁의 재조명』,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여기서 드러나는 조선 말기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역사관은 바로 20세기 초반 한반도가 겪은 일본으로부터의 야만의 참상은 마땅히 일본의 잔악함을 주목하는 것이 맞지만, 그와 못지않게 당시 민중의 개혁요구를 막기 위해 일본 군대를 끌어들인 당시 조선왕조와 양반세력들 또한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정확히 해야 할 점은 저자의 이러한 비판은 일본의 야만에 대한 비난을 상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저자가 첫 페이지부터 수시일관 주장한 것과 같이 가해자들이 저지른 악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단지 비판적 성찰을 통해 20세기 겪은 야만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자 함이다. 이번 절에서도 저자는 한국이 20세기 일본에게 당한 야만이 덜하거나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한 잔악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번 절의 사례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크게 세가지라고 제시하며 이 절을 마친다(83-84) – 첫째 한국 국민의 내적 역량 강화 이는 지역 간, 집단 간, 그리고 남북간의 분열에 대한 극복을 통해; 둘째 동북아에서의 세력균형 외교역량 갖추는 것 (---미 등 주변 4강 간의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경영외교); 셋째 동아시아 내 다자적인 평화 제도 건설에 대한 창의적이고 자주적인 외교역량발휘.



8. 한국전쟁과 충북 영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이번 절은 한국전쟁과 해외세력 개입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저자는 한국이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참전 미국인들의 희생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 한국전쟁의 비극은 북한 지도력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평가는 한국과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심각하게 도전받아본 적이 없는, 이에 대한 의문 자체가 금기시되는 것이라 요약소개한다(86).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공식사관을 그대로 받아만 들일 것이 아니라 당시 해외세력의 개입이 진정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한번 포괄적으로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전반적인 입장은 우선 우리 사회의 공식사관과 같이 참전 미국인들의 희생으로 한국이 자유를 얻고 당시 비극은 북한의 전면적인 군사행동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미국 그리고 뒤이은 중국의 개입은 내전적 성격으로 출발한 이 전쟁을 구제적 전쟁으로 비화시키고 마침내 엄청난 민족적 상처를 남긴 면도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의한 전쟁의 발발은 그 자체로서 역사를 크게 퇴보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도 이 땅에서 자유와 정의를 심기 위한 것이었고 또 그러한 결과를 긍정적인 것이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전쟁발발의 문제와 미국의 패권적 개입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공식사관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도 비판적 성찰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87-88) 궁극적으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요 의문”(87)은 미국의 개입을 과연 자유와 정의의 이름”(87) 아래로만 논의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미국의 패권적 개입문제”(87)는 어떻게 논의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비판적 성찰을 위해 저자가 언급하는 예들은 자유와 정의의 이름아래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한반도 개입에 대한 미국의 패권적 이익추구, 1950년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주민 700여명에 대한 미군들의 "학살만행"(93), 전쟁 중 여인들에 대한 집단강간 등 미군 전쟁범죄의 사례들, 그리고 한국전쟁 외에도 베트남 전쟁 중 미 라이라는 농촌에서 벌어진 무차별 학살도 언급된다.

무엇보다 북한의 남침행동이 동족상잔을 재촉하고 분단구조를 심화시킨 것에 대한 총체적 책임이 있지만, 이러한 북한의 전쟁책임이 미국이 한국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적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앞에서 소개된 다양한 역사적 야만사례들에 대한 공식사관을 뒤집어보는 것과 같이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 또한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냉철한 역사의식으로 우리 수난의 현대사를 돌아보아야 하며, 그 당시 시점에서 한국의 국가기구와 지주계층의 억압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일반민중, 당시 한국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의 시각에서 한국전쟁과 미국의 개입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91)



9. 탈냉전과 민족주의의 문제: 보스니아

탈냉전 시대 선진열강들의 무관심과 무능력”(94)의 사례로 저자가 꼽는 것은 보스니아 인종청소의 비극이 꼽힌다. 이번 절에선 역사 속의 야만에서 민족주의가 행해온 역할을 주목한다. 우선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전반 전쟁에 대하여 크게 3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고 소개한다. 첫째는 이것을 제국주의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네오막시스트 제국주의론자들이 말한 독점자본주의단계에 이른 세계자본주의열강들 간의 식민지쟁탈전이란 시각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 요소를 부가해서 보는 것이다. 즉 자본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민족과 국가 라는 매개와 부합하여 보고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자본은 민족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대외경쟁을 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모순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제국주의로 나아간다는 분석이다.(95)

세 번째는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권위주의국가 또는 파시즘국가들과 자유주의적 국가들(liberal states) 간의 정치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보스니아 사례의 경우 저자는 이를 두 번째 요소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비극이라고 말한다. 세르비아계 인종에 의한 보스니아 및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량살육은 2-3년에 걸쳐 광범위하게 벌어진 것이다. 보스니아 사례 뿐만 아니라 저자는 카린 폰 히펠의 연구를 언급하며 20세기를 포함한 인류의 근현대사는 모두 민족주의적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였다: 히펠의 연구에 따르면 “1990년대 현재 분리운동(secession efforts)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 18, 국토회복운동(irredentist efforts)이 일고 있는 곳이 18, 모호하지만 분리주의 또는 국토회복운동이 일고 있는 곳이 21, 그리고 공산주의와 구소련의 붕괴 이후 파생된 국가나 국가건설을 주장하는 곳이 26이다. (Karin von Hippel, “The Resurgence of Nationalism and Its International Implications,” in Brad Roberts ed. (1995) Order and Disorder after the Cold War, The MIT Press, pp. 108-110)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대표되었다고 정의한다고 해도, 이것이 끝난 탈냉전 시대에 와서는 다시 민족주의가 갈등의 중점으로 되찾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민족주의적 갈등 자체와 이것이 폭력적 결과로 이행된 결과들의 차이이다. 저자가 지적하길 민족적 차이가 언제나 야만의 실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소개한 보스니아 사례가 민족적 갈등이 폭력이란 비극으로 치달은 사례라면,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심한 스위스에선 그것이 폭력적으로 폭발하지 않은 사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민족적 갈등을 폭력으로 이어지게 하는가? 저자의 답은 첫째, 역시 기억의 정치” – 정치적 과정에 기인한다: “그것은 결국 인종적·문화적 공동체의 차이로부터 증오를 생산하고 그 증오를 다른 공동체에 대한 폭력으로 이행시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메커니즘은 결국 어떤 객관적 차이(인종적·문화적 차이) 그것 자체가 자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폭력의 기초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과정이 개재한 것을 말한다.”(97) 또한 기억의 정치와 더불어 두 번째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러한 폭력을 제어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국제환경의 문제, 즉 국제정치의 문제”(97)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0. 르완다의 비극과 한반도

이번 절에서 저자는 또 다른 다큐멘터리 1996 6.25 특집으로 방영된 『신이여, 르완다를』 소개하며 벨기에로부터 독립 이후 1960년대부터 시작한 후투(Hutu)족이 투시(Tutsi)족에 가한 대학살 사례를 다룬다. 정부를 장악한 후투족이 투시족을, 1994년엔 투시족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후투족을 학살, 이후 계속되어오는 비극을 겪고 있는 르완다 사례의 야만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먼저 과거 식민주의 시대의 유산으로부터의 영향을 주목한다.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기 이전 벨기에는 지배전략으로 인종 간의 차별정책을 취했고, 이것은 독립 이후 이러한 종족 간의 잔악을 일으키고 지속되게 한 주요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벨기에는 지배 당시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후투족을 냉대하고 숫자가 적은 투시족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 이들을 식민지배체제의 말단 관료집단으로 삼았다. 1962년 독립 후 르완다에서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후투족이 정부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 양 종족 간의 증오의 정치 그리고 그것의 폭력화가 진행되었다. 그것이 대량살육의 악순환에 뿌리가 되었다.”(99)

9절에서 민족주의가 정치적 과정으로 동원되어 비극으로 치달은 보스니아 사례와 달리 르완다의 사례는 외면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르완다 부족 간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이번 책에서 주장하고자 한 20세기 야만의 기원 기억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들끼리도 식별이 안되는 인종적 차이를 둘러싸고 이러한 엄청난 비극이 지속되는 데에는 거의 가상적이고 신화적인 것에 불과한 종족적 차이를 확대과장하여 양 종족 간에 증오와 폭력의 광풍을 몰고 오고 그것을 세대를 뛰어 넘어 지속시키는”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 르완다의 사례는 또 다시 정치적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내부에서 꾸준히 작동하고 있는 증오의 기억의 정치란 폭력으로의 연결고리를 찾았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결국 국제사회의 관심과 신중한 개입이 해답이라 결론짓는 듯 하다. 보스니아 사례처럼 내부에서 작동하는 기억의 정치가 실행으로 옮겨져도 국제사회가 방관하는 국제환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유의미했던 부분은 바로 한국 현대사와의 대조이다. 저자는 르완다의 케이스가 서구열강이 인종차별주의를 지배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라면 일본의 한국지배는 계급적 모순이 활용된 비극이라고 비교하였다: 르완다의 경우 식민주의시대 인종차별주의가 독립 이후 참혹한 비극의 큰 원인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일본의 계급모순을 활용한 전략이 독립 이후 한반도에 사회적 모순에 바탕 한 좌우대립이라는 사상투쟁과 이데올로기적 정치투쟁의 양극화를 가져왔고, 급기야 그것은 남북분단의 내적인 뿌리로 작용,” 그리고 그 남북분단이 6.25라는 한국전쟁의 기본환경이 되었다.”(100) 저자가 말하길 그런 의미에서 르완다는 지구 반대쪽 나라의 이상한 현상이라기보다는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의 구조를 떠올리는 측면이 있다.”

국제환경이란 외부적 요인과 내부에서 작동한 정치적 과정의 결합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두 나라의 비극을 초래하였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분석이다.



11. 제도로서의 전쟁

이번 절은 로버트 힌데와 헬렌 왓슨의 저서 <War: A Cruel Necessity?: The Bases of Institutionalized Violence>(1995)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힌데와 왓슨은 첫째, 적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하려는 노력을 포함하는 것 (경제제재, 경쟁, 협박, 공갈은 이런 의미에서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힌데와 왓슨의 결론엔 의문이 든다), 둘째, 전쟁을 일으키는 집단들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계와 차이를 중시하게 인식하면서 일어난다는 것, 셋째, 중앙집권화된 조직과 개인들의 집단적 동원을 포함하는 것, 넷째, 대체로 장기간 지속되는 것, 다섯째, 대부분 특정 집단 또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 답하였다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즉 전쟁의 동기는 많은 경우 매우 정치적인 것이라는 결론이다.(102)

또한 저자가 주장하는 기억의 정치와 유사하게 힌데와 왓슨은 전쟁의 중요한 고리로 당사집단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지식(social knowledge of historical relations between warring parties)”를 꼽는다. 특히 상대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역사적 지식을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a social construct)”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사집단들 모두 동원을 위해선 상반되는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매체나 다양한 루트를 활용하여 상반된 역사인식을 창조하고 지속시킨다. 따라서 전쟁이란 인간의 본성이 아닌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제도의 산물을 통해 전쟁이 일어난다는 주장으로 저자의 시각과 일치한다.

(Hinde, Robert A. and Helen E. Watson, eds. (1995) War: A Cruel Necessity?: The Bases of Institutionalized Violence, Tauris Publishers.)

전쟁을 정치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저자가 분석하길 힌데와 왓슨의 저서에 나오는 마크 루이스의 저작 “The Warring State in China as Institution and Idea”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루이스는 중국 전국시대의 전쟁과 사회정치질서의 관계, 전쟁 이론가들의 사상을 분석한 것이데, 당시에 대한 분석은 통치집단과 사상가들이 어떻게 전쟁을 하나의 제도로써 정당화하고 영속화시켰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주장하였다 (전국시대의 중국의 왕족들은 농민들의 징병을 통해 그들의 군사력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동원 작업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당시 사상가들은 전쟁을 인간의 본성에 기원한다기 보다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창조된 행동양식(a socially created form of action)”으로 보고, 따라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싸운다기 보다는 그들을 싸움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men had to be induced to fight)”이라고 파악하였다고 한다.(103)

기원전 4세기 진나라의 정치가 상앙이 저자가 루이스의 저작에서 뽑아오는 예인데 상앙은 농민들(국민들)을 동원하는데 2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보상과 처벌”(103)이라는 법체제를 통해 전쟁이란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선 보상에 대한 제도화를 위해 상앙은 군사적 업적(적의 머리나 귀를 제시)에 따라 직급을 수여하고 직급이 부여되면 땅과 노예가 지급하는 위계질서적 직급과 보상체제를 제도화하였다; 또한 처벌에 관해선 벌금에서부터 강제노역, 신체절단, 사형까지 단계화하여 이 또한 제도화하였으며, 인구 전체를 다섯 가구씩 묶어 서로의 죄(전쟁터에서의 비겁함 등)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전체 주민들을 전쟁이란 제도의 굴레 속에 묶어내었다.(104)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앞서 마사오가 지적한 것과 유사하게 개인들의 사적인 영역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그 사이의 구별을 지워 자기 나라의 군사적 승리를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으로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상앙 외에도 루이스가 다룬 사상가들은 기원전 4세기의 맹자, 기원전 3세기의 순자 등과 같은 유가인데, 그들은 상앙과 같은 법가와 달리 농민들의 동원을 도덕교육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교육을 통해서 효의 감정을 활용한 국가에 대한 헌신과 충성심을 기르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제도화 사회화를 말한 것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힌데와 왓슨의 저서에 언급된 라인홀드와 쿡의 연구를 통해 개인들의 의식이 가정교육에서부터 사회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결국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는 가정과 사회가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에게 상이하게 부여하는 역할, 가치관, 교육을 바탕으로 한 동일하지 않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분석이다. 즉 이러한 논리는 인간의 호전성이라는 본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가정과 사회라는 틀로 인해 특정방향으로 사회화된 과정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Rheinhold and Cook (1975), as cited in Sharon Smith and Linda Siegel, “War and Peace: The Socialization and Children,” in Hinde and Watson, p. 106)

무엇보다 전쟁을 하나의 제도로 분석하는 이러한 시각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교육, 사회화과정, 제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통치세력의 정당화와 동원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자발적인 비극을 초래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제도의 방향에 따라 20세기의 야만이 되풀이되는 것을 좌우할 것이라는 저자의 뜻이 드러난다.



12. 세계체제론에서의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모두 특정한 인간집단이 범주화된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20세기의 야만은 인종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앞의 제국주의적 사례들은 특히 근대자본주의문명과 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점들을 유념하며 저자가 여기서 던지는 질문은 “[그렇다면] 근대자본주의질서 자체 안에서 인종주의가 갖는 보편적 의미는 없는가이다. 인종주의에 치중하여 보면 자칫 일련의 사례들이 한 가지 집단이 범한 오류, “일탈들의 연속(필연적인 것이 아닌 특정 시대에 나타난 개별 사례들의 묶음)으로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질서라는 보다 큰 틀에서 본다면 이러한 비극들은 보다 필연적인 패턴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직관에 기인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인종주의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지적한 월러스틴의 대작 <Unthinking Social Science: The Limits of Nineteenth-Century Paradigms>(1991)를 인용한다. 간략하게 말해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해 몇 가지 주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인종적으로 차별받는 대상집단을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체계 안에 수용하면서도 그들 특정 하층집단의 정치적 능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데 중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110) 예를 들어 차별대상인 이민자집단을 받아들이되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고용체계에 수용하되 정치적 권리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특정 인종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정치적 부담없이 언제라도 고용에서 제외시켜 자본주의의 번영에 필요한 가장 값싼 산업예비군을 만드는 것이다.(110)

무엇보다 계급적으로 차이 받는 한 국가의 하층집단에 대하여 인종주의는 그들의 불만을 상쇄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요 인종 외의 인종집단을 소외하거나 인종별 차별을 두어 하층집단 아래 또 다른 하층집단()을 만들어 그들이 절대적인 (경제적-사회적) 최하층이라는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하층집단의 백인이 중산층의 히스패닉계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은 그가 비록 경제적 하층민일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론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계급적 차이로 인한 불평등을 포함해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불평등의 결과가 특정인종집단에게 집중된다. 자본주의의 계급적 불평등이 인종적 차별을 통해 걸러지고 매개되면서 무언가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계급적 불평등을 무언가 수용가능한 것으로 세탁하는 역할을 인종적 구분과 차별의 이데올로기가 담당해준다. 이것이 자본주의체제에서 인종주의가 수행하는 근본적인 기능이라는 것이 월러스틴의 주장이다.” (109-110)

저자가 소개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연관성에 대한 함의도 있다. 바로 세계체제에서 소외된 주변국들은 인종주의에 저항해 민족주의의식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민족주의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한다: 첫째,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하는 동력을 만들거나, 둘째, 세계체제라는 틀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사회화 시키는 역할이다.

궁극적으로 그렇다면 비극을 자주 초래하는 인종주의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월러스틴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 본다: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세계경제가 존재하는 한, 21세기에 인종주의와 결부되어 저질러진 제국주의국가들의 제노사이드적 죄악이 형태를 달리해 재연될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월러스틴의 관점에 대하여 저자가 결론짓길, 이는 현재에 대한 비관/포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인종주의적 불평등의 구조를 자본주의세계경제질서 자체의 한 본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그래서 인류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뛰어넘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인종주의가 자본주의가 맺고 있는 거시적이고 체제적인 연관성에 주목함으로써 인종주의의 탈을 쓰고 행해져온 전쟁과 야만에 대한 문명사적 조망을 촉구하는 혁명적인 관점이란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111)



13. 여성의 문제와 문화적 상대주의 그리고 평화

흔히 누락되는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를 “20세기가 풀지 못한 부정”(113)으로 규정하고 관련 주요 사례들을 다룬다. 이는 20세기 정치적 민주주의가 세계전반에 보편적인 규범으로 확산되어간 진보의 이면에 여전히 깊게 남아있는 이슈이다. 여성억압의 일차적 사례로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영아살해(infanticide)”이다.(114) 인도를 예로 드는데, 여기에선 한 해 수천 명씩 여아살해가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숫자는 바로 1990년대 초에 실시된 조사인데,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조사한 1,250명의 여성 중 절반 이상이 여아를 살해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John Ward Anderson and Molly Moore, “The Burden of Womanhood: Too Often in the Third World, a Female’s Life is Hardly Worth Living,” The Washington Post National Weekly Service, March 22~28, 1993.).

또 다른 여성억압의 예로 드는 것은 명예살인(honor kllings)”으로 남아메리카 브라질의 경우 1991년까지만 해도 남편이 부인을 죽이는 것이 형사범 처벌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선진국도 예외가 아닌데 미국에서는 18초마다 한 여자가 배우자에게 구타당한다.

세 번째 사례는 여성할례(female circumcision)”이다. 여성 성감대의 상징인 클리토리스를 어린 시절 부모들이 또는 부모들의 주선 하 강제로 제거하는 것(clitoridectomy)이다. 놀랍게도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도 1950년대 까지도 여성들의 레즈비어니즘이나 자위행위를 치료한다는 명목 하 일종의 의료행위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Nahid Houbia, “Female Genital Mutilation,” in Julie Peters and Andrea Wolper eds. (1995) Women’s Rights, Human Rights, Routledge.)

인용하고 싶은 많은 부분들이 있는데 이 절의 마지막 부분을 뽑아 적는다: “전쟁과 평화가 성의 차원을 내포한다고 하면 또 한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 사회의 자원배분의 우선순위가 전쟁준비를 비롯한 군비증강에 놓일 때 그 사회가 경제가 군사주의적인 성격을 띠며 국방비에 자원이 집중될수록 여성의 빈곤이 가중된다는 사실이다. 그 사회질서에서 가치의 배분기준이 복지 중심적인가 군비 중심적인가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여성의 성격과 지위가 그 사회에서 갖는 목소리와 영향력, 또 바로 그러한 관계가 결정지어지는 사회 양식이 국가와 사회들의 전쟁과 평화지향성과 일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124)



14. 21세기 첨단전쟁과 과학기술적 상상력

저자는 앨빈 토플러의 저서 <War and Anti War: Survival at the Dawn of the 21st Century>를 소개하며 글을 이어간다. 토플러는 20세기의 비극을 제2경제질서 산업화시대 대량생산경제체제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대량살상이라 이해하였다. 그리고 21세기에 대하여는 이른바 첨단정보와 지식이 지배하는 제3의 경제질서(이른바 3의 물결’; 1물결은 농촌경제체제-기계화, 합리화, 조직화 이전의 육박전 성격의 전쟁체제; 2물결은 산업혁명 이후 공장생산체제-기계화 조직화에 바탕한 대량파괴 양상)이기에 전쟁 또한 대량학살보다는 첨단정보체제에 의한 정확성 중심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Alvin and Heidi Toffler (1993) War and Anti-War: Survival at the Dawn of the 21st Century, Little, Brown and Company.)

하지만 저자는 토플러가 주장한대로 21세기의 전쟁이 깨끗한 전쟁의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란 것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특히 토플러가 예로 들은 걸프전의 경우 이라크를 상대로 과학과 기술적 우위에 바탕으로 한 첨단무기체계의 위력을 보여주긴 하였으나 여기엔 몇 가지 과장된 신화들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첫째 첨단무기체계에 대한 주장의 이면엔 탈냉전 축소될 위협을 느낀 미국 군산학복합체의 의도가 내포되어있다는 점이다. 첨단무기체계에 대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국가자원투자에 대한 정당화 및 미국국민과 의회에 인식시키기 위함이라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바로 평화는 첨단과학과 무기의 힘에 달성할 수 있다는 신화이다. 이러한 환상은 거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양의 자원낭비를 가리고 평화란 것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정치적 측면을 누락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토플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요약한다: “21세기의 경제질서는 20세기의 그것과 달리 정보와 지식이 주도하는 경제질서이고 그래서 20세기형 대량생산 중심의 경제와는 다르다는 것, 또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전쟁의 무기체계는 대량파괴와 살상의 성격을 띠지 않을 것이라는 토플러의 얘기는 잘못된 것이다. 과학기술과 생산의 방식은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경제력에 바탕한 파괴의 수단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문명적 행태 자체가 그와 함께 자동적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토플러의 시각은 일종의 도식적인 경제기능주의적 사고방식의 편린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133)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저자는 그의 주장을 다시 강조한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보다 다각적인 사회학적·정치적·철학적 성찰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135)



15. 20세기 전쟁의 야만과 근대문명의 비판

20세기의 가장 큰 모순은 바로 민주주의라는 진보를 이룬 정치혁명과 첨단과학의 발전이라는 기계문명이 역사적으로 기록되는 야만의 시대가 공존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20세기 전쟁과 제노사이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은 그것이 인류의 정치적 삶의 진보와 경제발전을 포함한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전개되었으며, 더구나 그러한 발전들이 전쟁의 양상을 더욱 잔혹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해 왔다는 사실이다.(136)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인류에게 가져올 진보에 대한 계몽사상이 허구로 나타난 시대이다.

홀로코스트와 파시즘이라는 인류의 진보를 퇴보시키는 사례를 사색하며 나타난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이다. 저자가 막스 호크하이머의 저서 <Critique of Instrumental Reason: Lectures and Essays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를 인용하며 소개하길 이들은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화과정(civilizing process)이 내포한 허구성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근대가 발전시킨 인간의 이성은 기술이성에 다름아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성을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에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정치적 혁명이 인류를 계몽시켜 야만을 극복시킨 것이 아니라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Dialectic of Enlightenement>(1997)에서 지적하듯 인류는 계몽을 통해 인간적인 조건을 창조하기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a new kind of barbarism)”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Max Horkheimer (1994) Critique of Instrumental Reason: Lectures and Essays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The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1997) Dialectic of Enlightenment, Continuum Publishing Company.)

과학기술만능주의적인 사고에 대한 회의는 18세기 말 막스베버에에 의해 의미 제기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베버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과학기술에 바탕한 인류문명의 합리화는 관료주의체제의 팽창을 초래하며, 그것은 인간행복의 증대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경고했다.”(140)

베버와 달리 카를 마르크스는 계몽주의 흐름에 속하였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비록 자본주의가 착취구조를 합리화한다고 비판은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역사 진보의 한 단계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력 극대화 이후 계급적 질서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 투쟁을 통한 비자본주의 사회의 실현을 통한 인간과 노동, 자연의 조화가 가능한 세계라 낙관한 것이다.(140)

과학기술에 대한 진보를 철저하게 회의한 또 다른 예로 저자는 19세기 말 니체의 철학을 언급한다. 즉 니체의 철학을 대표하는 니힐리즘은 현 세상을 넘어선 보다 본질적인 것, 세계 이전의 선험세계, 인간이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실체적 명제인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존재한다고 본 칸트의 합리주의, 도덕철학을 부정한 것이다. “세상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며 물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이삼성)”(141) , “물 자체란 굉장한 것, 아니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 공허하며 무의미한 것(니체)”(이보 프렌첼, 강대석 옮김, 『니체』, 한길사, 1997, 139.)이라고 말했다. 과학과 문명을 포함하여 인간을 구속할 어떤 도덕적 책임도, 또 그 책임을 규정하는 어떤 도덕적 지상명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141)

실제로 근대국가는 야만과 함께 발전한 것이다. 이는 저자가 인용한 근대국가는 전쟁의 규모와 함께 발전했다는 마이클 만의 <The Sources of Social Power>(1986) 저서(12-19세기 영국 국가재정의 70~90%가 전쟁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논증)나 민주화라는 정치혁명 역시 전쟁과 불가분한 운명공동체였다는 것을 밝히는 G. 서번의 저작 “The Rule of Capital and the Rise of Democracy”(1977)(전쟁에 대한 국민동원으로부터 발전한 민주화 민주화는 곧 군사적 성격의 업적, a martial accomplishment란 주장)를 통해 이해된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근대국가의 형성과 전쟁,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적 참여의 확대는 민족주의의 등장과 그것이 전쟁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증대와 불가분한 것이였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합리화에 바탕한 자본주의경제질서, 근대국가, 민주화 이 모든 근대문명의 최대 업적들이 전쟁의 팽창과정, 또 그 전쟁의 야만적인 대량생산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어왔다고 할 수 있게 된다.”(143)


무엇보다 근대문명이 야만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는 저자는 근대문명의 특징인 도구적 합리성에 기인한다고 재차 주장한다. 쉽게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성이라는 가치가 초기엔 현재를 새롭게 비판하고 이를 통해 계몽을 추구할 수 있었는데 반해, 이후 이것에 너무 의존적으로 되면서 기존의 도덕적 정치적 가치들은 뒤로하고, 결과적으로 이성주의를 위한 이성으로 변질되었다는 것 - , “도구적인 기술이성의 지배는 도덕적·정치적 가치들에 대한 비판적 이성을 매몰시키는 경향이 있고,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경우 특히 사회질서에 대한 옹호로 계몽이 변질되었다는 지적이다 – “계몽의 기능이 비판(criticism)에서 옹호(affirmation)으로 변질되면서 실증주의화하고 그 결과 이성은 도구화되었으며, 그때부터 진실은 사라졌다고 본 것이다.”(144)

앞서 저자가 소개하고 넘어간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바로 이러한 근대이성, 계몽사상이 이성으로 신을 대체하여 내세운 과학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144)을 한 학파인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따르면, 계몽 이후의 과학은 신을 대체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의 자연관은 그리스인들의 자연관과 크게 달랐다. 그리스시대의 자연개념은 인간의 정신 또는 주관성(mind or subjectivity)과 객체들의 세계(world of objects)를 철저하게 구별짓지 않았다. 반면에 계몽사상에서 자연은 일정한 법칙들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고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보편적인 과학이 파악할 수 있는 순전한 물질이라고만 이해했다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기술이 계몽사상가들이 생각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었다.”(144) “계몽의 과학적 합리성과 자본주의라는 근대문명의 기초가 담고 있는 자연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념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킨 데 거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몽과 근대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룬다. 신화와 마술이 풍미하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객체가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계몽과 근대에 이르면 인간 주체와 객체는 철저하게 분리된다. 그와 함께 외부세계는 수량화된 조작의 대상(quantified objects of manipulation)이 된다. 그럴수록 인간은 운명적으로 구조지어져 미리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역사라는 제2의 자연(second nature)에 의해서 억압받게 된다. 신화를 대체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산업기술이 사회적인 것을 물상화(reification of the social)시킨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증대될수록 그 과정에서 구축된 과학기술과 그에 바탕한 거대한 사회조직으로 말미암은 인간에 대한 억압은 깊어진다.”(146)

이성에 대한 허구성과 억압을 주장한 니체와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저자가 요약하길 니체가 이성 전체를 회의한 것에 반해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성을 도구주의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critical reason)으로 구분짓고 해방적인 이성(liberating reason)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의 지식활동 전반을 포괄하는 이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도구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 니체의 철학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 사이에 놓인 중요한 차이점이었다.”(147)지었기 때문에 이성 전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과학이성에 대한 기타 시각: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과학을 인류 전체의 해방에 역행하는 것으로. 이는 과학이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예측과 통제는 자연에 대한 지배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인간에 대한 지배로 확장되기 때문.” 그러나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느와 마찬가지로 해방적 과학(emancipatory science)”에 대한 가능성을 인식함 과학이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148)

-위르겐 하버마스:과학과 기술의 중립성을 주장.”(148) 그에게 과학은 사회적 영역이 아닌 “’합리적-목적적 활동’(rational-purposive activity)”란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과학과 이성을 비판한 위 학자들과 달리 사회적 지배의 문제는 사회적인 소통의 문제(communication problems)”이고 과학과 기술 그 자체와는 기본적으로 무관한 것이라 보았다.(149) 하버마스가 소개한 근대화과정(modernization process)를 보면 크게 세 가지 영역이 동시에 존재한 것의 결과물이다: 첫째는 과학이라는 인지적-도구적 이성의 영역,” 둘째는 도덕이라는 이성의 영역,” 셋째는 예술이라는 심미적-실천적 이성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비판된 과학과는 다르게 하버마스는 과학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이렇게 세 가지의 영역의 균형이 깨질 때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150)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추가 설명: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어떻든 마르크스주의가 주목했던 근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 즉 계급관리라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과학과 기술이라는 인간의 자연지배양식도 비판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근대문명 전반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과 비판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같은 노력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내포한 근대적 합리성 전반에 대한 비판운동이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가 전통적으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여 과학과 기술은 생산력의 영역으로 이데올로기는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한 것에 반해 이러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사실상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을 지우고 과학 역시 이성이란 가치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로 본 것이다.(150)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을 이어서 과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한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합리성과 객관성의 이름하에 과학으로 통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그것을 내세우는 인간집단의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결부된 이데올로기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151)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한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문명이 인간에게 해방과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와 파괴의 수단만을 발전시켜온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20세기 문명이 이룩한 업적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근대성의 표상인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러한 회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시도하고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이 주창하듯이 근대의 과학과 이성 자체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극복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근대이성이 내포한 세 가지 영역 사이의 균형과 통합이 과제인가가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전쟁과 폭력, 그리고 평화의 문제에 대한 사유도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의 탐구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151)